한국에서만 유독 자주 들리는 단어, '홧병'. 감정을 참다 병이 되는 이 독특한 문화는 어떻게 생겨났고, 왜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정서 억제와 사회 분위기를 통해 한국인의 홧병 문화와 그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봅니다.
정서 억제가 일상화된 사회, 홧병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참는 게 미덕이지.” “화내면 지는 거야.” 많은 한국인이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부끄럽고, 미성숙하다고 여겨졌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분노와 서운함, 억울함을 꾹꾹 눌러 담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정서 억제란 말 그대로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안에 눌러두는 행동입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한국 사회에서는 ‘인내’라는 이름으로 통제돼 왔습니다. 문제는 이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축적되고, 눌리고, 결국 마음뿐만 아니라 몸에도 병이 되어버립니다. 바로 ‘홧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서울의 한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매달 수십 명이 홧병 증상으로 내원한다고 합니다. 환자들은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올라오며,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이렇게 덧붙입니다.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혹은 “화를 냈다가 상처를 받을까봐요.”
홧병은 단순히 화를 많이 내는 성격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참는 사람, 너무 잘 참고 착한 사람에게서 더 자주 나타납니다. 즉, 이 병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문화적 질환이라 불릴 만합니다.
사회 분위기, 감정을 숨기게 만들다
감정을 억제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사회 분위기입니다. 한국은 여전히 집단주의 문화가 강합니다. 가족, 학교, 회사 등에서 ‘나’보다 ‘우리’를 우선시하며, 조화를 깨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처럼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회의 자리에서 불합리한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면 ‘예의 없다’고 비춰질까 봐 참습니다. 가족 간에도 갈등을 드러내기보다 ‘분위기 깨지 말자’며 조용히 넘기기 일쑤입니다. 감정 표현을 ‘문제 일으키는 일’로 보는 분위기는 사람들을 점점 무감각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감정은 썩어갑니다.
여성의 경우는 더욱 심각합니다. 전통적으로 ‘인내심 강한 어머니상’이 미화되며, 여성에게는 감정보다 ‘조용함’과 ‘헌신’이 요구되어 왔습니다. 중년 여성의 홧병 발병률이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2022년 정신건강복지센터 통계에 따르면, 홧병 진단을 받은 환자의 약 70%가 여성이며, 이 중 80% 이상이 40대 이상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성 역할 고정관념이 정신건강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정신건강, 참지 말고 다스려야 합니다
이제는 ‘참는 게 미덕’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입니다. 감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이를 억누르기만 하면 몸과 마음이 결국 파괴됩니다. 감정 표현은 곧 건강입니다.
그렇다면 홧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 감정 표현 훈련: 일기를 쓰거나, 감정 단어를 이용해 자신의 기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훈련이 도움이 됩니다. “그냥 짜증나”보다 “나는 무시당해서 속상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감정을 건강하게 다루는 첫걸음입니다.
- 상담과 치료 활용: 정신과 치료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초기에는 전화 상담이나 심리상담 어플을 통해 시작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서울시,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무료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기관이 늘고 있습니다.
- 사회적 인식 전환: 감정 표현을 ‘미성숙함’이 아닌 ‘성숙한 자기 돌봄’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학교, 직장, 가정에서 감정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홧병은 혼자만의 병이 아닙니다. 감정을 나눌 수 없게 만든 사회의 병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해결도 함께, 사회가 움직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홧병은 한국인의 정서 문화가 만든 슬픈 현실입니다.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도록 강요받아온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내가 아프다는 말조차 참는’ 사람으로 길러졌습니다. 이제는 그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회, 나의 감정이 존중받는 환경이 바로 정신건강의 시작입니다. 홧병이라는 이름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도록, 우리 모두의 시선과 태도가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